작가 유미리씨, 에세이 <생명> 출판 | 신문명 : 세계일보 | 2000년12월17일
아직도 규모가 작은 영세한 병원에 가면 복도의 한쪽 끝은 중환자실이고 반대편 끝에는 분만실이 나란히 붙어 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한쪽에서는 가족들의 침울한 표정과 울음이 있고, 또 한쪽에는 설렘과 초조함 때문에 안절부절못한다. 그런 병원의 복도에서 아이를 기다려본 사람이면 안다. 도대체 탄생과 죽음이란 어떤 것인지 그때만큼 절실한 의문으로 다가오기도 힘들 것이다. 탄생과 죽음이란 두 단어는 "생명"을 매개로 성립이 가능한 어휘들이다. 그 생명이 어떤 조건에서 태어나든 간에 생명 자체로 고귀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지난 97년 아쿠다가와(芥川)상을 수상한 이래 줄곧 화제의 중심에서 떠나지 않았던 재일교포 작가 유미리(柳美里.32)씨의 자전 에세이 <생명>(김유곤 옮김.문학사상사)은 바로 그런 얘기들이다. 유부남의 아이를 잉태해 겪어야 하는 미혼모의 고통과 그녀와 함께 살며 아이의 탄생을 지켜본 말기암 환자 히가시의 이야기가 오버랩되면서 삶과 죽음, 사랑과 집착에 대해 찬찬히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아기가 나를 마중하러 왔어. 누군가가 태어나고 누군가가 죽는다. 세상은 그렇게 돼 있는 거야."

말기 식도암으로 죽을 날짜를 받아놓은 히가시가 유미리에게 어느날 툭 던진 말이다. 히가시는 유미리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도쿄 키드 브라더스"에서 연극배우로 생활할 때 그녀를 지도했고, 후일 10여년간 동거했던 남자였다. 그와 헤어진 후 유미리가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아이를 잉태한 뒤, 그 유부남과 격렬한 싸움 끝에 결별하고 죽음을 앞둔 히가시와 서로 의지하며 다시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었다. 유미리의 <생명>은 자신의 사랑과 임신, 아이의 탄생과정을 한 축에서 세밀하게 그리고 있고 또 한편에서는 비슷한 비중으로 히가시의 암투병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처음에는 유부남인 줄 몰랐던 방송국 기자 신분의 애인은 임신사실을 알고난 뒤부터 모호한 태도를 취하다가 끝내 이기적인 발언을 반복하던 끝에 떠나고 만다. 알고 보니 그 남자는 타고난 바람둥이였고, 아내에게 이런 사실들이 알려질까봐 전전긍긍하는 처지였다. 유미리는 미혼모로서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남자에 대한 미련 사이에서 혹심한 고통을 겪는다. 이 과정에 대한 유미리의 고백이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고 투명하다. 이러한 솔직함은 그녀의 고백을 읽는 독자들을 강하게 흡인해내는 힘이기도 하다. 히가시는 헌신적으로 유미리를 보살피다가 아이의 탄생을 지켜본 후 결국 지난 4월에 죽었다.

이 책은 일본에서 지난 6월말에 첫선을 보인 지 1개월여만에 18만부가 팔려나가면서 일본 주요서점에서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일본 사회에 만연한 혼외정사와 목숨을 가볍게 아는 사회풍조가 인기의 배경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성장과정과 붕괴된 가족상황 등 자신의 얘기를 글로 써 왔던 유미리가 마침내 자신의 아이까지도 상품화하고 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유미리는 요코하마에서 재일한국인 부부의 딸로 태어나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해 불우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가출한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몇차례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고, 학교시절 내내 이지메(집단따돌림)를 당하다가 끝내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이번 에세이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유미리의 임신 사실을 알고 "만세"를 불렀다는 대목이 나온다. 어머니가 미혼모가 된 딸을 두고 만세를 불렀던 엉뚱한 이유는 "이제는 아이 때문에 미리가 자살하진 않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생명의 소중함에 눈을 뜬 유미리는 가족의 절실함에 대해서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그녀는 히가시의 죽음과 홀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 두려움 앞에서 이렇게 되뇌인다.

"나는 지금 투병과 출산 육아가 가족간의 유대에 의해서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지내왔던 독신의 방탕한 생활로부터 복수를 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용호 기자

제품명	생명
판매가격	1,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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